고향 대신 하나원 期數 … 북한 비판은 금기
지난달 28일 밤 9시50분, 생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김성희(29·가명)씨가 '한줄 1000원' 김밥집 의자에 앉았다. 고향 함경북도 회령을 떠나 한국에 온 지 4년. 속내 털어놓는 친구는 같은 동, 같은 층에 임대아파트를 나란히 받은 또래 둘뿐이다.
"같이 한국에 왔어요. 친구 많이 필요 없어요. 사람 잘 안 믿어요."
이웃 공단에서 밤 9시까지 이어진 잔업에 김씨 눈꺼풀은 무거워 보였다. 피곤에 지친 얼굴 뒤로 임대아파트단지 불빛이 어른거렸다. 국내 최대 새터민 거주지, 인천 남동구 논현동 논현주공 12단지다.
거기 있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
남동구 탈북주민은 1178명(3일 현재)으로, 전국 230개 시·군·구 중 가장 많다. 그 중 영구임대아파트인 논현주공 12, 14단지는 새터민 554명이 밀집한 국내 최대 '탈북자 타운'이다. 이들을 끌어들이는 건 두 가지. 인근 남동공단 일자리와 임대아파트였다.
동네는 지난해 2만명을 넘어선 남한 탈북자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인천새터민지원센터의 임순연 수녀는 남동구가 "한국에 온 지 10년 안팎이 된 사람부터 어제 하나원(탈북자 정착 지원시설)을 나온 이까지 연령, 직업, 출신지가 다양한 새터민을 다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정작 동네에는 '북한'의 흔적이 없었다. 12, 14단지 상가에 '새터민 상권'은 형성되지 않았다. 북한 식당은 북한식 순대를 파는 인근의 '해주순대국집' 한 곳. 그나마 99%가 남한 손님이다. 북한 관련 문화행사로는 유일했던 인천광역시평생학습관의 '북한 작가 작품전'(2월10∼22일) 관람객도 죄다 남한 사람이었다. 남동구 보건소에 새터민 결핵환자가 많아 '결핵실'이 바쁘다는 것, 구타 낙상 등으로 재활치료를 받는 새터민 덕에 동네 정형외과가 붐빈다는 것. 북한 커뮤니티의 증거는 그게 전부다.
단지 안 분위기도 비슷했다. 한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는 "새터민 여성이 남편이나 동거남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말했고, 또 다른 관계자도 "술 마시고 혹은 브로커와 돈 문제로 싸움이 종종 벌어진다"고 전했다. 정작 아파트 경비원은 고개를 갸웃댔다. "(탈북주민이) 많이 살지만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아요. 2006년 입주 초창기에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잘 못해서 시끄러웠지. 거야 몰라서 그런 거고. 지금은 전혀 문제없어요. 조용해요."(14단지 경비원) 남동공단 지구대에서도 "새터민 관련 112 신고는 한두 달에 한번 정도다. 일반 주민과 비교하면 오히려 적은 편"이라고 했다.
"몇 기세요?" vs "고향이 어디세요?"
새터민은 모여 살지만 모이지 않는다. 남한 사람과 말 섞는 것도, 낯선 새터민과 안면을 트는 일에도 몸을 사렸다. 동네에서 존재감이 희미한 이유다.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새터민이란 걸 감추려고 해요. 중국 교포라고 말하기도 하고. 모임도 겉으로 드러난 건 거의 없어요."(최미정 남동하나센터 사무국장)
그나마 친한 게 함께 탈북한 이들. 특히 2∼3개월 함께 정착교육을 받은 하나원 동기생과는 친분이 두텁다. 그래서 '탈북자 최대 인맥은 하나원'이라는 말도 있다. 한 탈북자는 "고향이나 학교, 과거 직업 같은 걸 물으면 꺼리는 사람이 많다. 처음 만나 쉽게, 편하게 묻는 게 '하나원 몇 기세요?'라는 질문"이라고 했다. 요즘 트렌드는 '남한 나이 몇 살이냐?'라고 한다. 남한에 온 지 얼마나 됐느냐는 뜻. 그러고 나서 하나원 기수를 묻는데 자기 기수를 먼저 말하는 게 예의였다.
감추고 숨으려는 심리에는 이유가 있다. 1998년 탈북한 뒤 중국을 거쳐 9년 만에 한국에 온 30대 이사라씨는 "새터민이 많으면 위험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논현동에) 안 오려고 했어요. 윗집도 새터민, 옆집도 새터민. 너무 많아서요. 북한 사람 세 명이 모이면 그 중 한 명이 간첩이에요. 그럴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사실이에요. 안 겪어본 사람이야 설마, 그러지만. 저 위에서(북한 보위부에서) 아예 새터민 명단을 갖고 있어요. 정보가 북에 가는 루트가 있는 거죠. 그래서 (새터민끼리는) 서로 안 믿어요."
남자와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안 탄다는 이도, 사석에서조차 북한체제 비판이나 정치 얘기를 피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테러 위협 때문이다. 상시적 불안과 공포. 그건 뼛속 깊이 새겨진 듯했다.
만나고 싶은, 그러나 두려운
14단지에 사는 윤지영(39·가명)씨는 얼마 전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함경북도 청진 평화인민학교(초등학교) 출신의 아무개를 아느냐고 했다. "내 다닐 때 같이 다닌 사람인데, 내 이름을 알더래. 동창이라고 날 찾더래. 여잔데. 하나원에서 나오면 날 찾을 줄 알았는데." 몇 개월간 친구 연락을 기다렸다는 윤씨. 소식은 결국 오지 않았다. "꼭 만나고 싶은데. 속상하지."
북한 이탈주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인터넷 사이트 '새터민들의 쉼터'에는 '사람찾기' 코너가 있다. 하루 7∼8건씩 올라오는 사연 대부분은 헤어진 부모, 형제를 찾는 내용이지만 동향 사람과 동창, 직장동료를 수소문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청진시 1980∼82년생을 찾습니다' '함흥 금사중학교 82년생 보시오' '함북 새별군 고건원 천리마 5갱탄광에서 오신 분들' '회령시 궁심동 사람들 봐주세요.' '회상구역 해빛중학교에서 온 친구들 봐주세요'….
중국, 태국을 거쳐 한국에 온 손숙희(40)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도 우리 동창들 찾자니까, 없대. 우리 아래또래(후배) 아가 하나 나온 게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목동 어데 미용실 차렸다나. 아직 못 봤어요. 그래도 인터넷에 사람 찾는다고 손전화(휴대전화) 올리고 그러는 건 위험하지."
타향의 새터민은 누구보다 애타게 사람을 찾는다. 다만 감정은 이중적이다. 만나고 싶지만, 두려운.
성이 세 번 바뀐 아이
새터민 학생 50여명이 다니는 인천 장도초등학교는 전국에서 새터민 학생이 가장 많은 학교다. 3년 한시적으로 사회복지사 2명이 상주해 탈북 학생을 돕고 있다. 이곳에서 남과 북, 두 문화는 공개적으로, 뜨겁게 맞닥뜨린다. 감추고, 웅크린 새터민도 자녀 교육에서는 목소리가 커지는 탓이다. 한 교사는 문화차이로 당혹스러웠던 경험을 들려줬다.
"운동회 때 덥다고 웃통을 벗고 러닝셔츠만 입은 채 돌아다니는 새터민 아버님을 본 적이 있었어요. 그때 많이 놀랐죠. 좀 다르구나. 학교가 (아이를)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거나, 토론 같은 걸 하면 '왜 애들을 놀게 하냐'고 항의하세요. 지난해에는 수업 중에 교실 문을 벌컥 열더니 아이 친구들에게 막 고함을 친 아버님도 있었어요. 반면 가정방문을 가면 정말 반갑게, 성의껏 맞는 이들도 새터민 부모들이세요."
새터민 아이라고 북한 문화에 익숙한 건 아니다. 대부분은 2∼3개 문화가 섞인다. 엄마는 북한, 한족 아빠는 중국, 아이는 남한에 익숙해 세 문화의 충돌 속에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장일태 장도초등 연구부장은 "아버지가 자주 바뀌어 안정적으로 학습할 수 없는 환경도 꽤 있다. 가르치던 아이 중에는 성이 세 번 바뀐 예도 있다. 탈북과 정착 과정에서 엄마가 재혼과 이혼을 반복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학습의 최대 장애물은 물론 언어다. 학생 다수는 중국에서 나고 자라 모국어가 중국어다. 말이 안 되니 수업을 이해할 리 없다. 장도초등학교의 경우 새터민 학생 비율은 6% 정도지만, 학습 부진아는 50%나 된다. 막상 교사들은 생활지도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역시 문화차이다.
장 부장은 "학력차이는 학년이 올라가면 줄어든다. (교사의) 노력에 달려 있다. 하지만 예절 같은 건 학교 노력만으로는 힘든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시간이나 약속 개념이 없는 건 고치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새터민 학생의 결석 및 조퇴는 일반 학생의 3배가 넘는다.
"두통, 복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요. 스트레스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겠지요." 남북은 아이들 안에서도 부딪치고 있었다.
인천=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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