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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체험 1박2일]겨울철 노숙인 ‘하룻밤의 휴식처’

무어. 2011. 3. 20. 19:55

ㆍ서울역 13번 출구 쪽 만화방·PC방

서울역 13번 출구. 서울역사와 가까운 이 일대는 '노숙인들의 거리?라 불릴 만하다. 1800원짜리 자장면을 파는 식당, 일용직 일자리를 구해주는 직업소개소, 서울시와 각종 종교단체에서 마련한 무료 급식소와 진료소에 사람이 가득하다.

↑ 서울역 앞 만화방의 밤 풍경.

↑ 서울역 13번 출구 앞 거리.

이런 곳을 배회하는 노숙인들 모두가 정말로 길에서 자는 것은 아니다. 추운 날에는 더욱 그렇다. 이 거리에 위치한 다시서기 진료소 앞에서 만난 한 노숙인은 최근 들어 서울역에서 생활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자정이 되면 역에서 '관리방침?을 내세워 노숙인들을 밖으로 내쫓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노숙인들은 밖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다시 역 안으로 들어가지만, 일부는 아침과 점심을 해결했던 13번 출구로 향한다. 이곳에 있는 PC방과 만화방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저녁밥 때가 되어 13번 출구 근처에 자리잡은 ㄱ PC방을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랜 기간 씻지 않은 듯한 냄새가 확 몰려왔다. '15시간에 1만원?을 내고 PC방 의자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자는 사람들이 풍기는 냄새다. 봉사단체에서 받은 듯한 노란 점퍼를 입은 사람도 있었지만, 양말을 신지 않은 발은 이들이 누구인지 간접적이나마 알려주고 있었다.

'덜컹덜컹?. 멀리서 기차 소리와 같은 전철 소리가 들려오는 구석 자리에 앉아 PC를 켰다. 부팅하는 데 5분이 넘게 걸렸다. 겨우 켜진 PC는 '스타크래프트? 이외의 게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물'이었다. PC를 놓고 한참을 낑낑대고 있는데 옆에 앉은 40대 중반의 남성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 자리는 게임하는 자리 아니야."

자다가 의자 뒤로 넘어갈까 걱정


황주기씨(가명)는 이곳을 오랫동안 출입해왔다고 했다. 황씨는 알이 작은 안경을 쓴 깔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진한 '노숙의 향기?만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슬쩍 웃으며 후배를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기자에게 인터넷 뉴스나 좀 보다가 의자에 웅크려 잘 것을 권유했다. 황씨의 모니터를 보니 8명의 남녀가 '조이XX?라는 사이트에서 화상채팅을 하고 있다. 3명은 카메라를 켠 상태였다. 그가 들어간 곳은 40~50대를 대상으로 한 채팅방이었다. 혹시 '성인채팅방?은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채팅방을 보니 한 40대 여성이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 고등학생 아들을 걱정하는 내용이 올라오고 있었다. 또다른 사람은 곧 닥쳐올 노후를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을 털어놨다. 황씨는 익숙한 듯 그들의 걱정과 고민을 적절하게 상대해주고 있었다. 채팅은 계속됐지만 황씨는 채팅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 풀지 않았다.

황씨는 자신이 2000년대 초에 실직한 뒤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으나 거듭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했다. 5년 전부터는 가족과 연락도 끊은 채 길거리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일거리가 있을 때는 건설 일용직도 하고, 철거 용역도 했지만, 겨울에는 이런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다. 황씨와 함께 채팅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40~50대 '보통 사람들?의 고민을 나누고 있었다. "나야 저 사람들과 처지가 다르지. 그렇다고 내 실제 모습을 말할 필요는 없잖아? 이러다가 저녁밥 먹고 와서 한숨 자고, 새벽에 다시 일거리 있나 나가봐야지."

사실 PC방은 잠자리로는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7시간에 5000원? 정액권만 끊어도 충분히 잘 수는 있지만, PC방 의자에서 잠을 잤다가는 뒤로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하룻밤을 지내기에는 만화방 의자가 낫지 않겠냐는 생각에 저녁을 먹고나서 ㄱ PC방 옆에 있는 ㄴ 만화방에 들어섰다.

유리없는 창문 비닐로 겨우 막아


주인 조씨는 "아침 9시까지 4000원"이라고 했다. 초등학생 때 가끔 가던 학교 앞 만화방과 큰 차이는 없었다. 한쪽 방에는 아저씨들이 모여 라면을 먹으며 공중파 드라마를 보고 있다. 또 한쪽 방은 사람들의 담배 연기로 가득하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니어서인지 일부는 책을 읽고 일부는 뒤로 젖힐 수 있는 의자에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전체 벽을 도배하다시피 한 책장에는 성인용 만화가 가득히 꽂혀 있다. 위층을 올라가면 군대 내무반을 연상케 하는 방이 또 있다. 조씨는 5000원의 추가요금을 더 내면 이 '휴식방?에서 잘 수 있다고 말했다.

아무 만화나 집어들고 성인 남자 체형에 딱 맞는 좁은 만화방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가져온 작품은 김성모의 '돈빨'이었다. 기자의 손에 쥐어진 책을 본 이문철씨(가명)는 좋은 책을 골랐다며 말을 걸어왔다. '돈빨?은 사채업을 다룬 작품이다. 중간중간 사채업자들이 사용하는 수법을 소개하며 독자들에게 사채에 속지 말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이씨는 자신이 바로 사채 때문에 길바닥으로 내몰린 사람이라고 말했다. 빚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댄 경험이 있다는 그는 "제대로 배우지 못해 뭘 해도 안된다"고 말했다.

기자라는 신분을 밝히고 이씨의 사연을 더 들으려는 순간 이씨는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여기서 잠을 자는 사람들 대부분이 새벽에 일나갔다가 지금 들어와서 잠만 자는 사람들이야. 서로의 사생활은 캐묻지 않는 것이 관례지." 그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이곳엔 7군데의 만화방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둘씩 문을 닫으면서 3곳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문철씨는 라면 한 그릇을 먹고 나서 내일을 위해 일찍 잠에 들었다.

어느덧 시간은 밤 11시가 됐다. 앉은 채로 눈을 감아봤지만 평소와 다른 환경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반대편 의자를 몸 가까이 끌어온 뒤 발을 얹었다. 웅크린 모습이었지만 앉은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살짝 잠이 들려는 순간 갑자기 잠이 확 깨버렸다. 다리가 풀어지면서 반대편 의자를 밀어낸 탓에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기 때문이다. 웅크린 다리가 풀리지 않도록 팔로 감싸안고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잠을 청했다. 이번에는 찬 공기가 문제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창 하나에 유리가 없었다. 대신 비닐 한 장이 겨우 창틀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주위가 온통 고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새벽 1시가 될 때까지 잠이 오지 않아 꼼지락댄 사람은 기자 혼자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코까지 골아가며 평온히 잠을 자고 있었다. 결국 기자는 고등학생 때처럼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이 들 수밖에 없었다. 4000원을 내고 허락받은 시간은 오전 9시까지였지만 불편한 자세 탓에 해가 다 뜨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몇 분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만화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뻐근한 몸을 이끌고 만화방을 나왔다. 만화방에서 대로 건너편인 12번 출구 쪽에 위치한 '동자동 제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신축공사현장?에서 기계장비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의 한 부동산업자는 지금의 공사현장 자리에 노숙인들이 잠시 살다 가는 고시원과 쪽방이 있었다고 알려줬다. 노숙인 단체 홈리스행동의 이동현 간사는 '제4구역?에 있던 노숙인의 수를 100여 명으로 추산했다. 이제 그 자리에는 노숙인들이 잠시 머물 수 없는 주상복합아파트가 세워지고 있다. 13번 출구 쪽에 위치한 만화방과 PC방 역시 언젠가는 '환경정비?의 명목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적은 돈으로 하룻밤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