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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날 유래와 연혁을 잠시 옮겨봅니다.

무어. 2011. 5. 4. 17:57

어린이날

유래 및 연혁

·1921년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란 말 처음사용
·1924년 국제연맹에서 '아동권리헌장' 채택
- 1923. 5. 1 일본동경에서 방정환 등 한국유학생이 모여 '색동회' 창립을 위한 첫 회합
- 1927. 5월 첫째 월요일을 '어린이 날'로 변경
- 1937. '어린이 날' 기념식 금지
- 1938. 5. '어린이 날' 폐지
- 1946. 5. 5 제24회 어린이 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5월 5일을 '어린이 날'로 결정
(건국준비위원회)
- 1948. 국제연맹 '아동권리헌장' 개정 선언
- 1957. 5. 5 '대한민국어린이헌장' 개정 선언
- 1959.11.20 유엔총회 '아동권리선언' 선포(전문10개조)
- 1961.12.30 5월 5일을 '어린이 날'로 지정(아동복리법)
- 1973. 3.30 [각종기념일에관한규정]에 규정
- 1975. 1.27 '어린이 날'을 법정공휴일로 지정(대통령령)
- 1976. 9. 3 [각종기념일에관한규정]에서 제외
- 1981. 4.13 5월 5일을 '어린이 날'로 지정(아동복지법)
- 1982. 5.15 [각종기념일에관한규정]에 재규정

우리 나라 어린이날의 역사를 살펴보면 첫 번째 어린이날은 지난 1923년 5월 1일이었다. 3·1 운동 뒤인 1921년 5월 1일 창립된 소파 방정환 선생 등이 주동이 된 천도교 소년회에서 그 이듬해 5월 1일 창립 한 돌 기념식 때 어린이날을 마련해 기념식을 올린 데서 비롯되었다. 이 때 소년회는 '어른에게 드리는 글'과 '어린이에게 주는 글'을 인쇄해 서울 장안에 뿌렸고 이듬해인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 천도교당에서 어린이날을 매년 연례행사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시 배포된 '어른에게 드리는 글'에 "어린이들을 내려다보시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십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되 늘 보드랍게 해주십시오"와 같은 문구가 들어있었다. 과연 오늘날 어른들의 어린이 대접이 어떠한가를 한번쯤 반성해 볼 때다.

이렇게 시작된 5월 1일의 어린이날은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5월 첫째 일요일로 바뀌었고 실제로는 어린이 없는 어린이날로 계속되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어린이날로 부활했는데 이날이 바로 5월 5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75년 정부에서 비로소 5월 5일을 정식으로 공휴일로 지정한 것이 바로 우리 나라의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날은 외국에도 있다. 싱가포르는 4월에 어린이날과 어린이주간이 있어 축제기간으로 지내고 있고 그리스는 5월의 어린이날주간에 거리는 온통 울긋불긋한 가면을 쓰고 어릿광대 삐에로 옷을 입은 어린이들로 가득 찬다. 인도는 11월 14일이 어린이날이고, 일본은 우리와 같이 5월 5일, 미국은 5월 1일이 어린이날이라고 하나 사실상 1년 365일이 어린이 세상이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의 어린이는 괴롭다. 어른들의 잘못된 가정교육, 물질만능주의, 과잉보호 탓에 '귀찮은 것은 싫어하고' '점수에 집착하고' '온실 속에서 자라며' '버릇이 없고' '자연을 모르며' 'TV와 전자오락에 묻혀 살고' '뛰놀 곳은 적은' 우리의 어린이들……. 어린이날 ** 돌을 맞아 미래의 밝고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는 어른이나 어린이나 다함께 가정을 소중히 가꾸는 그런 노력이 새삼 절실히 필요한 때다

국제연합아동권리선언 國際聯合兒童權利宣言1959년 11월 10일 국제연합 제14차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한 ‘아동의 권리선언’.

전문(前文) 및 10개 조(條)로 되어 있다. 이는 국제연맹이 1924년 제네바에서 채택한 5개 조로 된 ‘제네바 어린이 권리선언’을 1948년 7개 조문으로 개정하였다가, 1959년 완벽한 권리선언문으로 채택하여 세계에 선포하게 된 것이다.

이 선언의 밑바탕에 흐르는 취지를 살펴보면, 인류의 생명과 문화를 파괴해 버린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기인 1950년대에 더욱 철저한 아동의 권리보장을 각 나라별로 실행하기 위한 기본선언이었다. 국제연합에서 선포한 아동권리선언은 “아동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미숙하기 때문에 그 출생 전후부터 법적 보호는 물론, 이를 여러모로 잘 보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권리보장의 국제적 승인인 것이다. 이는 아동의 기본적 인권, 무차별 평등, 기회균등, 사회보장, 우선적 보호, 학대 방지, 모든 착취에서의 보호, 위난(危難)에서의 우선구조, 고아 및 기아의 수용 구호, 혹사 금지, 세계평화에 기여하게 함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한국은 1957년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을 기초하여 국제연합아동권리선언이 채택된 해인 1959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선포한 바 있다.

어린이 헌장 (The childrens charter)

어린이의 권리와 복지, 바람직한 성장상(成長像)을 제시하여 사회의 전체가 이를 지켜주고 키워가며, 또 어린이 스스로도 그렇게 힘쓰게 하기 위해 마련한 헌장.

최초의 헌장은 1957년 2월, 동화작가인 마해송(馬海松) ·강소천(姜小泉) 등 7명이 성문화하여 발표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전문(前文)과 9개 항의 헌장을 마련하여 같은 해 5월 5일, 제35회 어린이날을 기하여 공포하였다. 그 후 주무부서인 보건복지부는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등의 피상적인 내용을 전면 개정, 이를 1988년 제66회 어린이날을 기하여 다시 공포하였다.

이 제2의 어린이헌장은 전문과 11개 항으로 되어 있으며, 전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는 민주사회 시민으로서의 어린이상을 구체화하였다. 어린이헌장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은 모든 어린이가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으로 존중되며,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을 지표로 삼는다.


①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하며, 가정이 없는 어린이에게는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알맞은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② 어린이는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균형 있는 영양을 취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받으며 공해 없는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③ 어린이는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어린이를 위한 좋은 교육시설이 마련되어야 하며,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④ 어린이는 빛나는 우리 문화를 이어받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도록 이끌어야 한다.

⑤ 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환경을 제공받아야 한다.

⑥ 어린이는 예절과 질서를 지키며 서로 돕고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민주시민으로 길러야 한다.

⑦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는 마음과 태도를 길러야 한다.

⑧ 어린이는 위협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하고,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지도를 받아야 한다.

⑨ 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 버림을 당해서는 안 되고, 나쁜 일과 짐이 되는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하며, 해로운 사회환경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⑩ 몸이나 마음에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필요한 교육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빗나간 어린이는 선도되어야 한다.

⑪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겨레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키워야 한다.

방정환 ( 1899- 1931)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인 아동문학가.
호 : 소파(小波)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서울
주요저서 : 《소파전집(小波全集)》(1940) 《소파 동화독본》


선린중학, 보성전문을 거쳐, 일본 도요대학에서 아동예술 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하였다.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날'을 제정하였다.
그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 문화운동가로서, 또 사회 운동가로서 어린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1957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소파상' 이 제정되었고, 1978년 금관 문화 훈장, 1980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그가 생전에 발간한 책은 '사랑의 선물'이 있고, 사후에 발간된 책은 '소파전집', '칠칠단의 비밀', '글벗집', '소파 아동 문학 전집' 등이 있다. 방정환은 동화 구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뚱뚱하고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생긴 그가 동화를 이야기하면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귀가 솔깃해져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던 방정환은 순사에게 잡혀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죄수들에게도 이야기를 해주었고, 병원에서는 간호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진정으로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보낸 방정환은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하고 말았다.


나이가 채 20도 못 된 청년이 운니동의 천도교 예배당에 열심히 드나들고 있었다. 그 청 년은 천주교 예배당 안에 있다 천도교 청년회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어린이들 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 때 천도교의 교주 손병희는 이 청년을 유심히 살펴보았고, 그 청 년의 성실한 모습과 열정을 남달리 알아주었다. 그리하여 손병희는 그를 사윗감으로 골랐 는데 이 청년이 바로 열아홉살의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900∼32)이었다.

방정환은 서울 야주개(당주동)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때 야주개는 중 인 신분의 사람들이 주로 살았다. 그는 일곱 살에 부모의 허락도 없이 소성소학교에 다녔 으나 너무도 가난하여 소학교를 마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왕고모 집으로 옮겨 미동 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이어 선린산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2년만에 중퇴하고 조선 총독부 토지 조사국에 취업했다. 그곳은 우리의 국유지를 총독부 소유로 이관하는 일과 농민들의 생활터전을 빼앗는 곳이기도 해서 그는 이를 박차 고 나와 천도교 예배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손병희의 사위가 된 뒤 어린이운동에 열 성을 보였고, 이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3ㆍ1운동의 기세가 꺽 일 무렵, 그는 짐을 싸들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동양 대학 아동 미술과에 입학했다.


어린이 운동에 전력

방정환은 2년 뒤 고국애 돌아와 천도교 안에 정식으로 소년회를 조직했다 이는 문예. 체 육 등의 활동을 통해 어린이에게 정서와 건강과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조직한 것 이다. 또 이때 그는"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고 어린이 동화집도 냈다. 더욱 이 1923년 3월 1일에는 월간「어린이」라는 잡지를 창간했고, 이어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 를 연구하는 단체인‘색동회’도 조직하였으며, 이 해 5월1일 어린이 날로 지정하여 기념 식도 가졌다. 이 색동회에는 윤극영 마해송ㆍ윤석중 등이 가입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첫 어린이날 구호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였다. 그는 뚱뚱한 몸집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어찌나 이야기를 잘했던지 어른들도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가 첫 번째 어린이날 뿌린 전단의 첫구절 에서 어른에게는"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 보아주시오"라고 했고, 어린이에게는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라고 했다. 얼마나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표 현인가!

방정환이 어린이를 위해 글을 쓰고 강연할 때, 일제의 경찰은 그 내용을 꼬투리 잡아 서 대문 경찰서에 가두는 따위의 탄압을 했으나 그는 결코 굽힐 리가 없었다. 그는 눈이 오 면 눈을 맞고 눈물을 흘리며 쏘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이런 동요를 남겼다.

겨울 밤에 오는 눈은 어머니 소식
혼자 누운 들창에 바아삭 바아삭
잘 자느냐 잘 크느냐 묻는 소리에
잠 못 자고 내다보면 눈물납니다




순사를 울린 사람

그는 구연동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눈물을 옷깃에 적셨다 한다. 그를 감시하던 순사 가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끝내 눈물을 흘려 그에게 "순사를 울린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 었다고 한다. 그는 어린이만이 아니라 어디서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고, 감옥에 가 서는 죄수들에게 병원에 들러서는 간호원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를 보 아도 그는 타고난 어린이 운동가였던 셈이다.

방정환은 서른셋 삶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입원했는데 죽던 날 저녁 "가야겠어 문간에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어"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이 말은 바로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그는 곧장 동화의 나라로 갔을 것이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나 사상가는 아니 었지만 어느 누구보다 ‘어린이 사랑’의 소중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