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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 이선주의 세상사는 이야기-29] 택시에서 잠든 여성 취객 ‘지키

무어. 2011. 2. 7. 21:08

심야에 택시에서 잠든 취객(醉客) 깨우기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손님 다 왔습니다"하고 툭툭 쳐도, 흔들어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는 정말 난감합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에는 가까운 파출소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승객의 휴대전화에 전화번호를 이용, 승객의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합니다.

↑ [조선일보]택시기사 이선주씨

손님이 북적대는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 1시쯤의 일입니다. 강남역에서 강서구 공항동에 가는 20대 중반의 아리따운 여성을 손님으로 모셨습니다. 택시에 탈 때는 아주 멀쩡해 보입니다. 술 냄새도 안 나고, 목적지를 말하는 발음도 정확합니다.

20여 분을 달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때 쯤, 손님에게 물었습니다. "손님, 공항동 거의 다 왔는데 어디쯤 내려 드릴까요?" "……." 답이 없길래 뒤를 돌아봤습니다. 택시 내부가 따뜻해서인지, 원래 차 안에서 곧잘 잠드는 스타일인지 손님이 뒷자리에 반쯤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보통 여성 손님들은 신체적 위험에 대한 부담이 있어서인지 남성 손님들보다 쉽게 잠에서 깹니다. "손님 다왔습니다" 정도면 거의 잠에서 깹니다. 그래도 안 깰 경우, 무릎을 툭 치는 정도면 십중팔구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손님은 툭툭 쳐도, 흔들어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소위 '시체놀이'가 따로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승객 주변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찾습니다.

단축번호 1번 또는 2번에 저장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습니다. 잉? 그런데 이 휴대전화 주인은 1번도, 2번도 아니 5번까지 다 비어 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눌러 본 0번도 단축번호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근 통화목록을 눌렀습니다. 가장 최근에 통화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한 남자가 전화를 받습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대뜸 자기가 있는 강남역으로 여자 손님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왕복 택시비를 다 준다면서 말이죠.

난데없이 저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여자 손님이 택시에서 잠들기 전 통화하면서 "안 돼! 나 집에 갈거야! 나 그리 안 가!" 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죠. 상황을 보니 아까 그 "안 돼"라는 얘기를 들었던 남자가 술 취한 여자를 택시비 다 줄테니 데려오라는 것인데, 이거 어찌해야 합니까?

정신을 잃은 여자 손님을 이 남자에게 데려다 주려니, 택시비 몇 푼에 누군지도 모르는 '도둑놈'에게 진상하는 기분까지 듭니다. "우리 집에 딸이 셋 있는데…, 절대 그럴 순 없지!"

그래서 전화를 끊고, 통화목록의 두 번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벨이 10번도 넘게 울리고 나서야, 어느 여자분이 잠든 목소리로 전화를 받습니다. 여자손님의 친구라고 하더군요. 손님의 집에 전화를 걸어주겠다고 합니다. 잠시 뒤, 여자 손님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근처에 있는 공항동 주택가로 잘 갔습니다. 손님의 어머니가 한 5분여를 흔들고 깨웁니다. "야! 여기가 너 안방이니, 여기 아직 택시야~. 얼른 택시비 주고 내려!" 그제서야 겨우 일어나더군요.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과년한 처녀 분들의 '시체놀이'는 너무 위험합니다.

한 번은 목적지인 잠실등기소에 도착한 30대 중반의 남자 승객이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기에, 승객 휴대전화를 찾아서 통화목록을 열었습니다. 장인어른과 통화한 기록이 있더군요. 그래서 잠든 취객에게 소리쳤습니다.

"아저씨! 빨리 안 일어나면 장인어른께 전화해서 사위 찾아가라고 할 겁니다. 장인어른 전화번호가 010-5XXX-9XXX 이지요!"

아, 그랬더니 그렇게 안 일어나고 차에서 아예 누워 자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는 택시비를 주고 바로 내립니다. 깨운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 손님을 내려 드리고 한참 앞으로 가서 다른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으로 좀 전에 내린 남자 손님이 거의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갈지자 걸음으로 지나갑니다. 저 정도의 정신력으로 어떻게 택시에서 택시비를 주고 내렸는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음… 30대 중반의 남자들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역시 '장인'인걸까요?

◆ 이선주는 누구?

이선주(47)씨는 24년 경력의 택시기사다. 2008년 5월부터 차 안에 소형 카메라와 무선 인터넷 장비를 설치해 택시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동영상 사이트인 '아프리카(afreeca.com/eqtaxi)'에 '감성택시'란 이름으로 실시간 생방송하고 있다. 택시 뒷좌석에는 무선 인터넷이 가능한 카 피시(Car-PC)를 설치해 무료로 승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선일보를 비롯해 미 ABC 방송, YTN, SBS 등에 소개된 바 있다. 1999년에는 교통체계에 대한 정책제안 등의 공로로 정부가 선정한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조선닷컴에서 'eqtaxi'라는 아이디로 활동하고 있다. '만만한 게 택시운전이라고요?(1998)'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배꼽잡고(1999)' 등 2권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