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극복 수기 당선작]나는 더 일하고 싶었다 은상/ 박부호 | ||||||||||
이럴 수가 IMF 당시 휘몰아치던 감원 및 구조 조정이 바로 내게로 향한 것이다. 막상 내게로 향한 사약을 받고나니 정말로 눈앞이 캄캄하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감사님이나 사주(使嗾)를 한 임 사장님이 지난 10년 넘은 세월의 동고동락한 날들과 공로를 뒤로 하고 원망스러웠다. “알겠습니다” 하곤 3층 사장실을 나와서, 2층의 내 책상으로 와서 의자에 앉으려고 하니 맥이 빠졌다. 정신을 차려야지 하면서 조용히 차를 몰았다. 내가 여유 시간이 있으면 즐겨가는 금오산(金鰲山)으로 향했다. 삼릉앞 주차장에 차를 두고 마냥 계곡을 따라 올랐다. 당시 2003년 6월18일, 딸애들은 중3, 중2학년으로 한참 과외비 등 학비를 들여야 할 시기이고, 집사람은 허리디스크로 계단도 못 오르내리는 아픔으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더군다나 팔순을 바라보는 모친은 1972년도에 자궁암 방사선치료의 영향으로 고관절 수술을 하면서 그 후유증으로 뇌경색까지 겹쳐서 몇 년째 거동도 못하시고 누워만 계시며, 대소변을 받아 내어야만 한다. 지난 30여년의 파란만장한 직장생활들을 되뇌면서 상선암을 지나 금오산에 당도하였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시내 전경과 토함산 우측으로 보이는 회사 건물이 선하게 자연 그대로 보인다. 입사 당시만 해도 초라한 조립식 간이 사무실에서 선풍기, 석유난로에 의존하는 환경에서 이제는 어엿이 3층 건물에 에어컨 시설로 쾌적한 환경에 매출도 열배나 성장하였으니, 이젠 나 같은 사람은 별 볼일이 없게 된 모양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된다는 결심을 하고 하산을 하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집사람한테는 조용하게 ‘어쩔 수 없이 나에게도 올 것이 왔다’라고 말하고는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위로를 했다. 회사에 인수인계할 자료를 정리하고 나왔다. 이젠 내 살길은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그나마 노동부 고용지원센터에서 지원해 주는 실업 급여가 생활의 보탬이 되었고 위안이 되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퇴직금도 다 써버리고 나니 모든 저축이나 보험도 위축되는 실정이 되었다. 직업 알선을 몇 번 받아 면접도 보고, 나름대로 취직을 하려고 타 시도로 까지 열심히 알아보았지만, 그놈의 나이가 뭔지…반백이 되었으니…. 2004년도에 퇴직 직장의 하청업체 K사장의 요청으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3차 밴드인 조그마한 회사에 6개월여 근무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제조업 하청구조에 대하여 많이 알아 볼 수 있는 몸소 체험을 하였다. 제일 먼저 와 닿는 인력구조, 25여명으로 낮은 임금수준에 의하여 자주 바뀌는 입사, 퇴사자들, 모체로부터 단계적으로 제 경비 및 수수료가 떼어지고 수금이 되므로 악화 되는 자금난, 기계들이 노후가 되었고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장비 한 번 고장이 나면 답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기술적, 체계적, 자금적으로 대처하기가 정말 힘든 일을 하는 소기업체의 사장님은 진정한 이 나라의 애국자임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하는 뼈저린 경험을 한 기간이었다고 본다. 그야말로 소기업체의 한 사람씩은 조직과 직위 직책을 벗어나서 1인 다역을 손수 해야만 대처해 나갈 수 있고, 다재다능해야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환경임을 알 수 있었다. 창업도 생각해 보았다. 서울에서 열리는 창업박람회에도 가서 두루 업체를 상담도 하고 자료도 입수하여 검토를 해 보았다. 거의가 먹는 프랜차이즈사업이 주이고, 사진 또는 의료기 계통도 있었다. 상점, 시설과 인테리어비용 그리고 체인비 등 투자금이 만만치 않았다. 또한 생소한 업종들이라 덤벙 해보기에는 내 입장에서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캐릭터 및 즉석 사진촬영 기기 설치 사업에 대하여는 물론 예로부터 사진에 대한 촬영 취미와 완전 수동으로 약품 처리하여 인화를 해 본 경험이 있어 관심은 많았다. 하지만 현 디지털 시대가 확대되어 가는 시점에서는 재삼 고려해 볼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집사람이 시내에 알바를 해서 반찬값이라도 벌어야겠다고 해서, 옷 가게에 점원으로 나섰다. 원래 은행관리자 출신이라서 상냥하게 손님맞이와 판매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주인의 하인 취급하듯이 시시콜콜한 잔심부름을 시키는 데에 대하여 설움이 북받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변의 권유로 어린이집 교사로 가기로 하였다고 상의를 하는 것이다. 준교사 자격증이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장기적인 생활로 보아서는 자주적인 사업이 필요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안을 했다. 꽃집 운영을 하자고, 집사람도 꽃을 무지 좋아 하였고, 직장에 있을 때 꽃꽂이 수강도 하였고 직접 은행 창구나 지점장실에 꽃을 장식하는 실력이 있으니, 조금만 더 배우면 될 것이니 우리의 가게를 열자고 했다. 집사람도 흔쾌히 응했다. 근데 문제는 허리 디스크가 안 좋은 것이다. MRI 검사하고 유명한 병원엔 다 다녀보고, 한방치료, 물리치료 번갈아 가면서 매일 치료하는 사람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조그마한 화분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는 중환자인데…. 일단 가게를 내기 위한 공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도로변에 있는 밭에다가 비닐하우스를 짓기로 하고, 내 나름대로 컴퓨터 엑셀에서 기본 설계를 하고 요리조리 비교, 검토, 수정하여 전문 업체에 견적을 받아서 최소의 비용으로 효율적 시공에 들어갔다. 집사람은 나름대로 화훼장식기능사 국가기술자격증은 취득해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열심히 학원이랑 남의 가게에서 배우고 공부를 했다. 오십 나이를 바라보면서 밤샘도 하고, 손이 부르트도록 실습을 했으나 처음으로 실시하는 제1회 시험에서 1차 이론은 합격하고 2차 실기에서는 고생한 보람이 없었다. 더욱더 보강 실습을 하고 제2회에서 자격증을 땄다. 기쁨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두 딸들과 함께 자축 케이크를 자르면서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 동안 나는 은행에서 대출 자금을 이용하는 관계로 비용을 줄이려고 가능한 내 힘으로 했다. 하우스 건립과 전기공사 빼고는 급수배관시설, 바닥 채우기와 보도블록깔기 그리고 화분 받침 진열대 등 설치를 마무리했다. 서서히 영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근데 하나의 아주 슬픈 안 좋은 일이 생겼다. 어머님이 병마에 고생만 하시다가 운명을 하셨다. 2005년 1월2일 오후 11시경. 2002년도에 전남 여수에 있는 한 유명하다는 병원으로 고관절 수술을 하러 가면서 여수대교를 배경으로 막내 동생과 엄마와 함께 서서 찍은 사진이 눈에 선하다. 마모된 고관절의 마찰로 주어지는 그 고통이 워낙 심해 마지막으로 수술을 기어코 고집하시어, 그 수술 후유증으로 뇌경색이 와서 순천병원을 거처 경주로 후송되어 병원생활을 하시면서 이후 줄곧 누워서만 살으셨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셨다. 집사람에게, “너 시집오기 전에 다니던 성당에 나가거라” 어머님 장례를 집안 어른들의 반대와 원성에도 불구하고 1991년도 돌아가시어 공원묘원에 매장한 아버지 시신과 함께 화장을 하였다. 놀라운 것은 14여년 넘은 세월에도 아버님의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 깨끗하고 홀가분하게 하늘나라로 보내어 드렸다. 어머님의 살아생전에 즐겨 부르시던 나훈아의 ‘너와 나의 사랑’ 노래 가사가 귓전에 와 맴돈다. 미워도 한세상…좋아도 한세상… 마음을 달래며 웃으며 살리라 바람따라 구름따라 흘러온 사나이는 구름 머무는 정든 땅에서 너와 함께 살리라 집사람은 마침 같은 아파트의 언니격이며 어려울 때 항시 조언과 격려를 해주시는 최비비나씨와 울산 친구 김율리안나가 냉담하지 말고 성당에 다시 다니자는 적극적인 권유로 성당에 나가기로 했다. 물론 나도 좋을 대로 하라고 해 주었다. 포항에 있는 교적을 옮겨서 열심히 미사 참여와 기도를 하다 보니 마음의 안정과 무엇보다 허리 디스크가 놀랄 만큼이나 많이 좋아졌다. 내 성장 환경과 성격상 어려운 정황에서, 결국 한 번 더 성당에서의 결혼식인 신부님 주례로 혼배 성사를 했다. 유달리 성가대까지 찬송을 해주었고, 많은 지인들의 축복을 받았다. 졸지에 피로연과 함께 헌신랑의 발목을 교우들에게 매달리는 곤욕을 치렀다. 드디어 2005년 3월5일(토) 소진플라워(딸들 이름-소영,진영)라는 간판을 달고 화원을 정식 오픈했다. 하우스 건평 210㎡에 상품을 제법 갖추어 두고선 오전 10시에 다니는 천주교 주임신부님 주관으로 교우들과 함께 축성식을 가졌다. 많은 친척분들과 친구들, 옛 동료들이 찾아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 하늘도 도와서 축복을 보내서 그런지 오후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저녁에는 엄청나게 내렸다. 밤새도록 내린 눈이 경주지역에 그것도 3월에 그렇게 많이 눈이 내리기는 처음인 것 같다. 개업하는 날에 폭설이 내려와 주니 앞으로 우리 화원이 잘 되리라고 장래를 전망했다. 전국꽃배달전문서비스와 화훼장식기능사의 집으로 배송사진촬영 제공이라는 내용과 최고의 품질로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 우선은 과거 직장과 거래 업체, 그리고 친척들과 학연, 지연으로 연결되어 매출이 점점 늘어 갔다. 때론 축하화환 제작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많다. 특히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은 전국적으로 주문이 와서 때론 시간적, 재료 부족으로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발생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몇 년 지나다 보니 이젠 계절별로 안정적으로 잘 되어 가고 있고, 규모에 비해서 혼자서 영업과 관리 그리고 배송 후처리까지 하기는 과중한 사업이다. 특히 요즈음은 배송된 상품에 대하여 디카사진 촬영의 의무화로 업로드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모든 상품의 질이나 포장 등에도 눈길이 한 번씩 더 가야만 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 두 딸들도 이젠 의엿한 대학생들로 성장하였다. 둘 다 고맙게도 착실한 생활로 학업을 충실히 하고 있고, 현재 우리 화원의 수입으로 학비 조달과 생활비 그리고 대출금 이자 납입 등을 그런대로 맞추어 가고 있다. 우리 부부 둘이서 마음적으로 서로 위로를 하면서 생활의 터전인 화원에서 오늘도 안정적인 성장을 기하고자 최선의 노력으로 경주하고 있다.
그나마 자연과 함께 하다 보니, 텃밭도 일구어 고추, 상추 부추 등등을 심어 자급자족하기도 하고 이웃에 나눠주기도 한다. 첫 해엔 바보짓도 했었다. 어느 비오는 날, 잘 자라는 농작물에 복합비료를 마구 뿌린 결과 제일 먼저 고추가 죽고 방울토마토 잔디까지 그 뿌린 부위는 말라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직장생활 하다가 보면 때론 ‘농사나 짓지’하는 말이 허무맹랑하게만 들린다. 하우스 주위에 잡초가 워낙 많이 자라다 보니 토끼를 사육하면서 야생 동물에 대한 이해와 일생을 관찰할 수가 있었다. 특히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은 새끼가 20여일 동안 땅속에서 길러져서 밖으로 나온다는 사실이 동물세계에서 제일 연약한 토끼의 생존과 종족 보존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토끼의 일생을 관찰하면서 나약한 우리 인간들의 생존 경쟁과 자연에 대처해 나가는 본능에 대하여 새삼스레 존엄성과 가치관을 높여 본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프랑스 사상가 J.J 루소의 근본사상을 나타내는 논제와 같이 -인간은 본래 자연인으로서 선량하고 자유롭고 행복하였지만 불평등사회로 접어들면서 악해지고 타락하고 노예화되었으므로, 본래의 상태인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 근원적 무구(無垢)를 회복해야한다 - 는 뜻이 있듯이 오늘도 후일을 위하여 우리들의 진정한 삶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며 열심히 생업에 충실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더 일하고픈 직장생활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않고 있다. 규칙적인 생활에 조직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동감과 희로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동료들의 땀 냄새가 그립다. 일이 밀리면 잔업과 철야를 해가면서 성취감도 있고, 때론 같이 회식도 하고 체육대회, 야유회, 가족의 경조사 참여를 통하여 인간애를 느끼면서 한데 어울려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것이 사회생활의 묘미라고 생각되어 진다. 지금이라도 다시금 조직사회에 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
- 2008년 10월 1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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