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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광 선생의 안산 역사이야기] <4> 안산의 또 다른 이름, 장항구현 |
최근 중국에서 일고 있는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인해 우리 내부에서는 ‘고구려를 제대로 알고 지키자’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한 검토와 대응책이 마련되고 있으며, 많은 국민들 역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이 옛 만주 지역과 오늘날의 북한지역이다 보니 한강 이남 지역에 살고 있던 우리로서는 좀 먼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안산지역은 분명 옛 고구려의 영토였고, 그 찬란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바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의 일부이기에 이제라도 고구려와 안산의 그 특별한 인연을 제대로 살펴보고 알아야겠다. 고구려는 건국 후 소수림왕(小獸林王;371∼384) 때에 이르러 국가 체제를 정비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91∼413) 때에는 활발한 정복사업으로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은 장수왕(長壽王;413∼491)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427년)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한 후, 남하정책(南下政策)을 펼치며 백제를 공격한다. 그리하여 백제의 수도인 한산성(漢山城)의 북성(北城)을 먼저 공격, 화공전술로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다시 남성(南城)을 공격하여 마침내 당시 백제 개로왕을 죽이게 된다. 이로써 한강 유역은 백제에서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이 된다. “장구군(獐口郡)은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개명(改名)한 것으로 지금의 안산현(安山縣)이다. 『三國史記』35 잡지 4 지리 2 장구군” 바로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안산의 옛 이름이 장항구현(獐項口縣) - 다른 기록에는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고도 기록되어 있음 - 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안산지역이 장수왕(長壽王) 63년(475년)에 고구려로 복속되었다가 이후 백제 성왕(聖王) 29년(551년)에는 다시 백제 영토로, 그 2년 뒤에 다시 신라가 이곳을 정복할 때까지 76년간 고구려의 지방행정조직으로 편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구려의 지방행정구역은 전국을 크게 5지역으로 나누고 5부를 설치하였는데 그 지역의 책임자(장관)를 욕살(褥薩)이라 하였다. 그 밑으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군(郡)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라는 관리를 파견하였고, 현(縣)에는 가라달(可邏達)을 파견하였다. 안산 지역도 장항구현 담당 관리인 가라달이 파견되어 이 지역의 행정적,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였을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모두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자연적으로 우리 안산도 한강 일대와 더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 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산둥반도와 거리가 가장 가까운 서해안 일대에 접해 있는 안산은 그 중요성이 더하였을 것이다. 안산의 옛 사람들은 고구려 삼족오의 깃발아래 고구려의 군사로 전쟁터에 배치되었을 것이며, 남쪽으로는 백제 ․ 신라의 움직임과 대륙의 변화에도 신경을 쓰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가장 많이 일어났던 당시의 안산 사람들이 고구려인으로 혹은 백제인, 신라인으로 살아가면서 어떠한 자부심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되는 삼국간의 전쟁 속에서 백성들은 늘 고단하고 무거운 삶의 무게를 느끼면서 살지 않았을까? 신대광 원일중학교 교사·안산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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