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총람 - 함양박씨(朴) - 인물 소개
박(朴)씨
본관은 문헌에 30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시조 또는 중시조가 밝혀진 것은 70본 내외이며, 그 중 주요 본관은 밀양(密陽), 반남(潘南), 죽산(竹山), 함양(咸陽), 순천(順天), 고령(高靈), 무안(務安), 충주(忠州), 상주(尙州), 창원(昌原), 음성(陰城), 영해(寧海), 영암(靈巖), 진원(珍原), 고성(固城), 울산(蔚山), 운봉(雲峰), 춘천(春川), 비안(比安), 강릉(江陵), 월성(月城), 태인(泰仁), 면천(沔川), 삼척(三陟), 문의(文義), 장성(長城) 등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화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 왕실의 56대 세계(世系)는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婆娑王)과 일성왕(逸聖王) 대(代)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파 관적(貫籍)했고,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한편 일성왕계는 그의 25대손인 경명왕(景明王), 경애왕(景哀王) 대에서 다시 갈라졌는데,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밀양, 반남, 진원박씨 등),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고령박씨),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함양, 삼척박씨 등),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죽산, 음성, 고성박씨),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상주, 충주박씨),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전주, 무안박씨),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순천, 춘천박씨 등),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경주박씨)의 8대군파와, 국상공파(國相公派:울산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 8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김씨, 이씨와 함께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며,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1만 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3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81만 5151 가구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 %로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3위였다.
본관 명열
강릉(江陵) 개성(開城)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주(廣州) 구산(龜山)
군위(軍威) 나주(羅州) 노성(魯城) 면천(沔川)
무안(務安) 문의(文義) 밀양(密陽) 반남(潘南)
봉산(鳳山) 비안(比安) 사천(泗川) 삼척(三陟)
상산(商山) 상주(尙州) 선산(善山) 성주(星州)
순창(淳昌) 순천(順天) 여주(驪州) 영암(靈巖)
영해(寧海) 운봉(雲峰) 울산(蔚山) 웅진(熊津)
월성(月城) 은풍(殷豊) 음성(陰城) 음죽(陰竹)
의창(義昌) 의흥(義興) 인제(麟蹄) 전주(全州)
정선(旌善) 죽산(竹山) 진원(珍原) 창원(昌原)
춘천(春川) 충주(忠州) 태안(泰安) 태인(泰仁)
평산(平山) 평주(平州) 평택(平澤) 함안(咸安)
함양(咸陽)
【함양박씨(咸陽朴氏)】
8대군파 속함대군의 정통 후손이며, 시조(중시조)는 고려의 예부상서 선(善)이다. 고려시대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고종 때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진 신유(臣)의 여섯 아들에서 6파로 갈라졌다. 즉, 군기소감공파(軍器少監公派) 지문(之文) 문원공파(文元公派) 지빈(之彬)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지량(之亮) 부사공파(副使公派) 지수(之秀) 어사공파(御史公派) 지온(之溫)․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지영(之穎)인데, 이 6형제파를 세칭 육지파(六之派)라고 한다. 이 중에서 문원공파와 부사공파가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을 열거하면 충좌(忠佐) 초(礎) 습(習) 대립(大立) 세영(世榮) 세무(世茂) 세옹(世) 민헌(民獻) 헌(軒) 등이다. 조선시대에 6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역사상 인물
박경후(朴慶後/164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함양(咸陽). 자 휴경(休卿). 호 취옹(醉翁), 만오(晩悟). 1675년(숙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주서(注書), 수찬(修撰), 정언(正言)을 거쳐 82년 통신사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90년 승지,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기 양주의 《좌찬성박대립비(左贊成朴大立碑)》와 경북 경산군 하양(河陽)의 《통제사김시성비(統制使金是聲碑)》에 그의 글씨가 남아 있다.
박기겸(朴基謙/?~?)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함양(咸陽). 자 문수(文秀). 호 삼덕재(三德齋). 충남 공주(公州) 출생. 문인이면서 무예가 뛰어났다. 1866년(고종 3) 10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함대 격파시에 공을 세웠다. 그에 앞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號)를 불태울 때도 크게 활약하였다.
박대립(朴大立/1512~158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함양(咸陽). 자 수백(守伯). 호 무위당(無違堂). 이황(李滉)의 문인.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급제, 양주(楊州)의 교수(敎授)로 나갔다. 형조좌랑 때 수십 년 묵은 송사(訟事)를 판서에 항변하여 종결시켜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의 추천으로 지평(持平)이 되었다. 67년(선조 1)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부제학이 된 후 대사간을 비롯,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이어 형조판서로 특진했다. 그 뒤 이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거쳐 우찬성이 되고 82년 돈령부판사를 지낸 뒤 다시 우찬성, 좌찬성이 되었다.
박성양(朴成陽/?~?)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 함양. 호 금은(琴隱). 시호 정헌(正憲). 정몽주의 문인(門人). 고려가 망하자 문소현(聞韶縣:경북 의성)의 봉두산(鳳頭山)에 은거, 태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에야 부름에 응하고 원수(元帥)로 출전하여 대승하였다. 그 후 보덕(輔德), 좌장사(左長史), 우장사를 지내고, 태종 때에는 전라도안렴사, 함경도북영병마사를 지냈다.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를 따라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로 대마도를 정벌하고 돌아와서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다. 이어 이조참판, 도총부부총관을 지냈다. 경북 의성군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되었다.
박세영(朴世榮/1440~155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함양(咸陽). 자 경인(景仁). 호 구당(九堂). 형조정랑(刑曹正郞), 돈령부정(敦寧府正) 등을 거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지냈다. 글씨를 잘 써서 국서(國書), 표계(表契), 비갈(碑碣) 등에 필적이 많이 남아 있다.
박세옹(朴世/1493~15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함양. 자 경운(景雲). 호 진목정(眞木亭), 명헌(明軒). 1519년(중종 1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2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그 뒤 검열(檢閱)을 거쳐, 39년 당상관(堂上官)이 된 뒤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냈다. 한성부좌윤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40년 병조, 이조의 참의(參議)를 지냈다.
박소립(朴素立/1514~158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함양. 자 예숙(豫叔).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에 급제, 주서(注書), 정자(正字), 수찬(修撰)이 되었다. 사림(士林) 출신으로 촉망을 받으면서, 63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그러나 이조판서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이량과 가까운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개월 뒤 이량 등의 퇴진으로 부교리(副校理)에 복직, 67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이준경(李浚慶), 이양원(李陽元) 등과 함께 선조를 즉위시키는 데 공을 세워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71년(선조 4)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 이르렀다.
박습(朴習/?~141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함양. 태종 때 강원도관찰사, 인령부윤(仁寧府尹)을 지내고, 1412년(태종 12)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전라도도관찰사를 지내면서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하여 송덕비가 섰다. 17년 경상도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에 임명되어 방간(芳幹) 등의 죄를 다스릴 것을 상소하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고, 18년 병조판서 재임시 태종에게 병사(兵事)를 품의하지 않고 처리한 죄로 사천(泗川)에 유배되어 참수되었다.
박승원(朴承源/1562~?)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 함양(咸陽). 자 계유(季悠). 호 설파(雪坡).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의거, 97년 정유재란에도 다시 의병을 모아 임환(林)과 함께 왜적을 격파하고,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계원도유사(繼援都有司)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다시 의병을 모아 싸웠으며, 36년 병자호란 때도 75세의 노구로 조행립(曺行立)과 함께 의병을 모아 군량미 수송에 힘썼다. 뒤에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으며,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박영문(朴永文/?~151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함양. 생원(生員)으로서 무과에 급제, 연산군 때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을 지냈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10년(중종 5) 경상도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있다가, 유순정(柳順汀)을 따라 부원수(副元帥)로서 삼포왜란(三浦倭亂)을 평정한 공로로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간관(諫官)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신윤무(辛允武)의 집에 드나들면서 조정을 비난하고 문신들을 비방하였다. 마침내 신윤무 등과 함께 영산군(寧山君) 전(`)을 추대하고 무신난을 모의하자, 의정부의 관노(官奴) 정막개(鄭莫介)가 이를 밀고하였다. 대역죄(大逆罪)로 몰려 사형되고, 아들도 모두 교수형되었다.
박종부(朴宗阜/1600~164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함양. 자 자후(子厚). 1633년 생원시에 장원, 이어 증광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종부시직장, 시강원설서, 사서, 사간원정언, 헌납, 홍문관부수찬, 수찬, 교리, 전라도도사, 이조좌랑, 김제군수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 세자를 따라 들어갔으며, 육지의 군대가 움직이지 않자 목숨을 걸고 장수(長壽)로 나와 적과 싸우도록 지휘관을 독려하였다. 종전 후 척화신(斥和臣)을 위협하고 국왕에게 강화를 강요한 신하를 탄핵하려다, 상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한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전라도도사로 있을 때 민폐를 시정하고 진휼 사업을 벌였다. 강직한 언론활동이 높이 평가되었으며,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박주대(朴周大/1836~1912)
한말의 위정척사론자. 본관 함양. 자 계우(啓宇). 호 나암(羅巖), 침천(枕泉). 경북 예천 출생.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1872년(고종 9) 향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진사시에 또 장원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선배로는 권연하(權璉夏), 동배로는 김흥락(金興洛), 권세연(權世淵), 이만도(李晩燾) 등과 친밀하였으며, 후배로는 곽종석(郭鍾錫), 장화식(張華植) 등과 왕래가 잦았다. 1882년 과거에 응시하러 상경하였으나 매관매직의 정국에 회의를 느껴 그날로 시를 지어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84년 복제개혁령이 내리자 권경하(權經夏), 황재영(黃在英) 등과 문산사(文山社)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고례(古禮)의 수호에 앞장서는 한편, 향교의 교수직을 맡아 학자와 인재 배출에 노력하였다. 을미의병 때에는 예천 사림에 의해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동생 주학(周學)을 보내고 자신은 창의통유문(倡義通諭文)을 짓는 등, 안동, 예천 지방의 의병장 권세연, 이강년(李康秊), 서상렬(徐相烈) 등을 지원하였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자신의 문인, 제자들에게 배일사상을 심어주는 데 힘쓰는 한편, 자신의 재산을 털어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명예보다는 실천을 행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중시하였다. 문집에 《나암유고(羅巖遺稿)》 《나암수록(羅巖隨錄)》, 저서에 《문음보(文蔭譜)》 《심성촬요오도(心性撮要五圖)》가 있고, 편서로는 《유문경제(儒門經濟)》 《성학십도해설(聖學十圖解說)》 등이 있다.
박주운(朴周雲/18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함양(咸陽). 생원(生員)으로 1852년(철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냈다. 64년(고종 1) 성균관 직강(直講),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67년 칠곡부사(漆谷府使)로 나갔다. 문장에 능하고 수학, 역학 등 학문에 통달하였다. 저서에 《역학연고(易學演攷)》가 있다.
박지계(朴知誡/1573~163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함양. 자 인지(仁之). 호 잠야(潛冶). 시호 문목(文穆). 인격과 학문을 겸비하여, 1606년(선조 39) 왕자사부(王子師傅)로 천거되나 나아가지 않았다. 09년(광해군 1) 좌세마(左洗馬) 겸 서연관(書筵官), 이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23년 인조반정 직후 사포(司圃), 지평(持平)을 거쳐, 이괄(李适)의 난 때는 인조를 공주로 호종하였다. 32년 사업(司業),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역임하고,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을 종묘(宗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조판서가 추증, 아산(牙山)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 《근사록의의(近思錄疑義)》 《주역건곤괘설(周易乾坤卦說)》, 문집 《잠야집》이 있다.
박초(朴礎/1367~1433)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 함양. 자 자허(子虛). 호 토헌(土軒). 1391년(공양왕 3) 김자수(金子粹), 김초(金貂), 윤향(尹向) 등 척불론자(斥佛論者)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불교 배척의 상소를 올려, 공양왕의 미움을 받아 김초와 함께 순군옥(巡軍獄)에 갇혀 사형받게 되었으나, 정몽주(鄭夢周), 정탁(鄭擢)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1404년(태종 4) 좌헌납(左獻納)으로 있다가, 앞서 선공감승(繕工監丞) 재직시 관철(官鐵) 300근을 유용한 사실이 드러나 장형(杖刑)을 받았다. 1413년 전라도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로 갔다가,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7년 제주목사에 이어 의주목사가 되고 18년 병조참의, 19년 좌군절제사, 전라도수군도절제사, 경상우도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를 지냈다. 31년 강계절제사(江界節制使)가 되고, 33년 야인(野人) 침입에 대한 방비소홀로 참패하여 막심한 피해를 초래한 죄로 처형되었다. 선조 때 신원(伸寃)되었다.
박충좌(朴忠佐/1287~1349)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 함양. 자 자화(子華). 호 치암(恥菴). 시호 문재(文齋). 백이정(白正)의 문인.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1332년(충숙왕 복위 1) 전라도안렴사(按廉使)로 있을 때 무고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 해도(海島)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감찰지평(監察持平), 예문응교가 제수되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내서사인(內書舍人), 밀직제학(密直提學), 개성부윤(開城府尹) 등을 지내고, 44년(충혜왕 복위 5) 지공거가 되었다.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가 되어, 왕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시강(侍講)하여 상을 받았다. 이어 삼사판사에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에 책록,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온후하고 검소한 대신으로 이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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