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 얘기 ====/나의 생각, 글

공자님의 귀한 말씀을 옮겨봅니다. 세겨 봅시다~

무어. 2011. 3. 20. 19:19

 

나는 하루에 세 번 나 자신을 반성해 본다. 남을 위해 충을 다했는가, 친구와 사귀어 신(信)을 지켰는가, 배운 것을 남에게 전했는가 하고.

 

나라를 다스리려면 식량을 충분하게 마련하고 무기를 충분히 마련하여 국민들이 위정자를 믿게 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위정자를 믿지 않으면 정치를 해나갈 수 없다.

 

나라의 질서가 바로잡혀 있을 때에는 돈이나 지위가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된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돈이 있고 지위가 높다는 것이 수치이다.

 

나무가 먹줄을 좇으면 곧아지고, 사람이 충간(忠諫)함을 받아들이면 거룩해진다.

 

나쁜 일을 하여 하늘에서 죄를 받으면 빌 곳이 없다.

 

남들이 듣기 싫은 성난 말을 하지 말라. 남도 그렇게 너에게 대답할 것이다. 악이 가면 화가 돌아오니 욕설이 가고 오고 매질이 오고 간다.  

 

남에게 듣기 싫은 성난 말을 하지 말라. 남도 그렇게 너에게 대답할 것이다. 악이 가면 화가 돌아오니 욕설이 가고 주먹이 오간다.

 

남의 충고를 달갑게 받아들여라. 그러나 윗사람이나 친구간에 너무 자주 충고나 간언(諫言)을 하지는 말라.

 

내 가르침은 간단하고 그 의미를 쉽게 터득할 수 있다.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그 전부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

 

내 자신을 심하게 탓하고 남을 가볍게 책망하면, 원망을 멀리하게 된다.

 

널리 배워서 뜻을 도탑게 하며, 간절하게 묻되 가까운 것부터 잘 생각하면 인(仁)이 그 속에 있다.

 

높은 낭떠러지를 보지 않고서야 어찌 굴러 떨어지는 근심을 알고, 깊은 연못에 가지 않고서 어찌 빠져 죽는 근심을 알겠느냐? 큰 바다를 보지 않고서야 어찌 빠져 죽는 근심을 알겠느냐? 큰 바다를 보지 않고서야 어찌 풍파에 시달리는 근심을 알겠느냐?

늙은 사람들은 편하게 모시고, 친구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고, 젊은이는 부드럽게 대하게나.

 

 

 


공자의 생애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B.C. 551년, 노양공 22년). 그의 조상은 원래 송나라의 귀족이었으나 노로 망명하였다.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자가 숙량이었다. 그러므로 보통 숙량흘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를 낳을 당시 10대의 어린 소녀였다. 60세가 넘은 숙량흘은 안씨의 셋째 딸을 후처로 맞이한 것이다.
  공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즉 어머니가 이산에 기도를 드려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그의 머리 가운데는 들어가고 나온 데가 있어 이름을 구(丘 : 언덕)라고 했다고 한다. 무인이었던 공자의 부친은 그가 세 살 때 돌아가시고, 모친은 그가 24세 때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어릴 적에 제기를 벌여놓고 예를 베푸는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는 그가 어려서부터 비범한 자질을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에게는 고정된 스승이 없었다. 그는 다만 타인의 장점을 본받고, 단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공은 "우리 선생님께서야 어디에서나 배우시지 않은 데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찌 정해진 스승이 있겠습니까(자장-22)?"라고 말한 것이다.
  공자는 19세 때(B.C. 533년) 견관씨의 딸과 혼인하여 다음해 아들 리를 낳았다. 그는 결혼하던 해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노나라 계씨의 창고 관리직을 맡은 그는 곡물출납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21세 때 가축을 관리하는 일을 맡에 그 번식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미 30대 청년시절에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이는 삼환씨였다. 이들은 국토를 채읍으로 삼고 군대와 가신을 길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소공은 계평자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삼환씨의 단결된 무력에 패하여 그는 제나라로 도주하였다. 공자도 패배한 임금의 뒤를 쫓아 제나라에 갔다(B.C. 517년, 공자 35세 때).

  제나라 경공을 만난 공자는 정치의 요체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안연-11)."라고 말해 주목을 받기도 한다.
  제나라에서의 관직 등용에 실패한 공자는 악장을 만나 순임금의 소를 듣고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 음악으로 인해 석달 동안 고기맛을 잊었다고 한다(술이편). 공자가 다시 노나라에 돌아온 뒤에도 정치는 어지러워만 갔다. 임금인 정공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고 계씨는 계씨대로 가신들의 발호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즉 가신 양화가 공산불뉴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의 반란은 계환자의 계략으로 간신히 수습되었다.
  공자는 51세 때(B.C. 501년) 노나라 중도의 재에 임명되었다. 중도 고을은 그가 다스린지 1년만에 치안과 질서가 바로잡혀 다른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 해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협곡에서 회맹하였다. 이 때 경공은 무력으로 정공을 위협했으나 공자는 그의 야비한 처사를 꾸짖었다. 이에 제나라는 사과하는 뜻에서 이전에 빼앗았던 세 고을을 노나라에게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이런 공로로 공자는 다음 해(B.C. 499년, 53세 때_ 사공(건설부 장관), 그리고 다시 다음해에는 대사구(법무부 장관)로 승진하였다. 그는 곧 삼환씨의 세력 근거지인 세도성을 허물기로 하였다. 이는 바로 임금의 권위와 실권을 회복시키고자 한 조처였다. 이 일은 맹손씨 가신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B.C. 496년(56세 때)  정승의 일까지 겸직하게 된 공자는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대부 소정묘를 처형했다. 이렇게 되자 이웃 제나라에서는 노나라의 국력이 비대해짐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은 대부 여서의 책략을 채택하여 노래와 춤에 능한 미녀 80명과 말 120필을 노에 보냈다. 정공과 계환자는 이 선물을 받고 사흘이나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공자는 이들과는 큰 일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벼슬을 버린다.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 위해 주유천하의 길을 나선 공자는 위·조·송·정·진·채·초를 방문하였다. 공자는 여행 중 여러 차례 고난과 박해를 당해야 했다. 그는 송나라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겪었고, 또한 광에서는 양호로 오인되어 닷새 동안 잡혀 있기도 했다. 또한 진·채에서는 7일간이나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였다. 이렇게 공자는 13년 동안이나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자기의 도덕정치를 채택할 임금을 찾았으나 끝내 만날 수 없었다. 당시의 제후들은 공자의 주장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만 생각했다. 그것은 이들이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과 권모술수에 의한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제후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공자는 후진의 교육을 위해 13년 동안의 유랑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노나라에 돌아온다(B.C. 484년, 68세 때).
  고국에 돌아온 그는 시·서·역·예·악·춘추를 재편찬하여 이를 정식 교재로 채택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조처는 후진들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러나 교육에 전념하는 그에게 슬픈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즉 그의 외아들 리가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B.C. 483년, 공자 69세).
  리가 죽은 다음해인 B.C. 482년에는 그가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또 죽었다. 이때 그는 "아!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선진-8)!"하고 탄식하며 절망에 잠겼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2년 후에는(B.C. 479년(노애공 16년, 73세) 4월 기축일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만년에 자기의 한평생을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뜻이 뚜렷하게 섰으며, 마흔 살에는 판단에 혼란이 없게 되었고, 쉰살에는 하늘이 내린 사명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듣는 대로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되었고, 그리고 일흔 살에는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위정-4)."
  공자는 이처럼 자기 완성을 위해 한평생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만대의 사표가 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