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7시50분 신도림역 만남의 광장. 크로스백 하나를 메고 운동화에 가벼운 옷차림을 한 노인들이 즐비하다. 어림잡아 100여 명은 돼 보였다.
노인들은 하나같이 귀에 핸드폰 이어폰을 낀 채 여기저기서 통화를 하더니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일명 '지하철 택배'. 지하철 운임이 무료인 65세 노인들이 주로 고용돼 수도권 내 물건 운송을 원하는 고객들을 상대로 영업이 이뤄진다. 노인을 지칭한 '실버 택배'로 불리기도 한다.
퀵서비스와는 달리 배송에 시간은 좀 걸리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해 중소기업이나 개인 등이 주로 이용한다.
오전 10시20분. 1년 넘게 지하철 택배일을 하고 있는 이민식(66.가명)씨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네네. 773번이요. 9천원. 신당동이요? 알겠습니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전화를 받고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더니 773번에 기재된 주소를 확인한 후 이 씨는 급히 벤치에서 일어섰다.
"출근한지 2시간 만에 첫 주문이예요. 이 서류는 우리 업체 주요 고객들이 모두 적힌 목록인데 773번 고객은 금천구청 쪽에 있는 의류업체네요. 빨리 가야 됩니다."
신도림역으로 들어서며 그는 전화를 걸었다. "여기 지하철 택배인데요... 지금 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배달 주문을 한 업체에 중간중간 전화를 걸어 이동 중임을 알려야 주문 취소를 하지 않기 때문에 고객과의 통화는 필수다.
이 씨의 발걸음이 바쁘다. 하루는 아파트 경비, 하루는 지하철 택배일을 하는 이 씨는 2남1녀 중 막내아들(29), 부인과 함께 사는 가장이다.
일흔이 다 돼가는 나이지만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이유다. 한 달 동안 15일은 경비일을 하고 15일은 택배일을 해서 버는 돈은 140만 원 정도.
경비일로 110만 원을 벌고 지하철 택배로는 30여만 원 버는게 고작이다. 오전 8시부터 밤 7시까지 12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수도권 곳곳을 누비지만 하루에 3만 원 벌기가 힘들다.
"경기가 좋지 않아 지난해보다 택배 주문이 많이 줄었어요. 거기다 업체에 지불할 수수료는 계속 늘어 밥값 빼고, 휴대폰 요금 빼면 남는 돈은 거의 없죠."
30여 분 만에 금천구청역에 도착했다. 부리나케 내려 700여m를 걸었더니 물건을 수령할 의류업체에 다다랐다.
이번 주문은 의상 한 벌과 각종 샘플이 붙여진 서류 한 장. 큰 서류 봉투에 담아 가방에 넣고 또다시 분주히 움직인다. 물건을 갖다줘야 할 최종 목적지는 서울 중구 신당동.
1시간 여 만에 도착해 물건을 받을 고객과 네 차례에 걸쳐 통화를 하고 나서야 골목 골목에 위치한 배송지를 찾았다.
"걷는 것 보다 더 힘든게 길 찾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가 자주 가는 곳이니까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는데 우리는 출구에서 나온 뒤부터 앞으로 가야할지 뒤로 가야할지, 인근에 상가는 뭐가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줘야 찾을 수가 있어요."
길을 제대로 못찾거나 늦게 찾아 업체로부터 안좋은 소리를 듣고 그만두는 노인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낮 12시 20분. 첫 번째 배달을 마쳤다. 오전 8시에 출근해 4시간여 만에 9천 원짜리 배송 한건을 완료했다.
이 씨가 고용된 택배 업체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마쳤다고 보고하자 '동대문 운동장 역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주문이 이어져야 좋은데 이 씨는 또다시 기약없는 기다림에 나서야 했다.
이날 하루동안 이 씨가 번 돈은 모두 3만 4천 원. 이 중 30%인 1만2천 원을 택배 업체에 내야 한다. 이것이 택배 업체가 이 씨를 고용하며 내건 '조건'이기 때문이다.
"수수료 떼고 휴대폰비 떼고 하면 남는게 워낙 없으니까 점심은 거의 굶어요. 오후 2~3시쯤에 1천500원 짜리 김밥 한 줄 먹는게 전부죠. 하루종일 일하고 버는 돈이 그 정도니 아까워서 쓸 수가 없어요."
그나마 기다리는 시간이 적고 일거리가 많으면 손에 쥐는 돈이 많을까 싶어 다른 택배 업체를 찾아가 봤지만 사정이 비슷한데다 일부 업체의 경우 35%까지 수수료를 요구해 그만뒀다.
"35%까지 요구하는 곳이 있더라고요. 자기들은 앉아서 전화만 받고 컴퓨터만 보는 건데... 택배기사 20명만 있어도 한 사람당 1만원 씩 걷는다고 치면 하루에 20만 원이예요. 한 달이면 600만 원이죠."
일은 노인들이 다하고 업체는 가만히 앉아 수백만 원을 버는 기형적인 구조인 것.
하지만 업체들은 "사무실 월세 내고 각종 운영비에 구청에 세금을 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지하철 택배 업체 관계자는 "우리도 영세하다. 업체가 워낙 많아 포화상태인데 주문도 없어 열이면 다섯은 문을 닫는다"고 말했다.
이 씨는 몇 일전, 한 택배 업체에서 "일거리를 많이 주겠다"며 스마트폰을 강매당한 뒤 힘겹게 해지시킨 경험을 털어놓으며, 약한 노인들을 상대로 업체가 노동력 착취도 모자라 악덕 상술까지 부린다고 토로했다.
"지하철 택배 자체는 아무도 반기지 않는 노인들을 고용해 우리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스템이지만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어 문제예요. 정부가 일자리 늘린다 늘린다하는데 지자체 차원에서 지하철 택배를 운영해서 우리를 직접 고용해줬으면 좋겠어요."
오후 6시45분. 총 3건의 배달을 마치고 수수료를 뺀 2만2천 원을 쥔 채 이 씨는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퇴근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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